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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104

그대와 있다면 무심코 짊어져 버린 수많은 것들 당연히 짊어져야 했다고 여겼던 그 많던 감정들의 무게 억눌림 짓눌리다 허리가 굽는다 무거움 압박당해 숨 쉬지 못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럼 그대를 만나지 못했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그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럼 태어난 이유가 없었겠지 얼굴을 쓰다듬고 두 손을 잡은 채로 입술을 맞추고 등허리를 매만지며 숨결을 묻히다가 두 눈을 맞추고 짊어진 것들 따위 모조리 버린 채로 하염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그대와 2022. 9. 10.
원고지 속 그대 텅 빈 밤, 작은 조명이 비치는 갈색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에 글자를 적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란 윤동주와 나태주 그리고 그대 릴케와 다자이 오사무, 또 그대 만년필 속 검은 잉크에는 갖가지 시들이 들어있고 나는 그저 그 시들을 말없이 받아적는 것 꽃잎이 비처럼 내린다던가, 흰 눈이 그대를 닮았다던가 그따위의 글들을 적으며 그저 괴로워하는 것 나의 그대는 떠난 지 오래인데 원고지 속 그대는 누구시길래 나의 사랑을 받으십니까 나의 그대는 이제 없는데 원고지 속 그대는 대체 누구시길래 나의 작별을 받으십니까 사랑과 슬픔, 헤어짐, 그 모든 감정들의 대상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어찌 나의 감정을 솔직하다고 거짓말하며 적어 내린다는 말입니까 2022. 9. 9.
작가 풀벌레 소리 창밖에서 나지막이 들려오고 가냘픈 달빛 창밖에서 방 안을 둘러보는데 책상 위의 주황빛 조명은 하얀 종이조차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오직 검은 글자를 적는 검은 연필만이 제 색을 잃지 않습니다 책상 구석에서 재떨이를 꺼내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불을 붙이는 당신은, 혹은 당신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한숨이 섞인 하얀 연기를 입으로 내뱉는군요 혹은 한숨을 가리려 하얀 연기의 속에 섞어 입으로 내뱉는군요 오늘도 당신 혹은 누군가의 밤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군요 2022. 9. 6.
노란 꽃 노란 꽃이 피었어 그대가 알려주었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네 그래서 나는 그냥 노란 꽃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대가 있었다면 꽃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도 기뻐했을 텐데 그대가 없으니 내게는 그저 꽃으로 불릴 뿐이야 그저 꽃으로 말이야 잠에 들고 아파하며 소리치면 그대는 없어 하루를 살고 절망하며 울어봐도 그대는 없어, 여전히 노란 꽃이 피었어 그대가 알려줄 정도로 이름이 있는 꽃이 피었어 그러나 그대가 없으니 나는 그저 노란 꽃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2022.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