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시집104

봄날 창밖에 새겨지는 투명한 빗방울들은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줄기가 되어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라났을까, 이 정도로 자라났으면 꽃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잠잠했던 나의 마음에 꽃의 꿀 향을 은은하게 퍼뜨립니다 무릎을 감싸안고 주저앉은 채로 수없이 되뇌이던 사랑이 너무나 아파서 그대를 품에 안고 가로등 아래에서 계속 중얼거리던 사랑을 이제는 할 수 없어서 나는 정리하려 합니다 그 모든 것들과 그대의 모든 것들을 말이에요 나는 버리려고 합니다 그 모든 것들과 그대의 모든 것들도 말이에요 답답한 가슴은 누군가 다가와 비워줄 수 있겠지요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저 기다리기만 하며 멈춰 있는 것이겠지요 2022. 5. 13.
나를 봅니다 거리낄 것 없던 마음에 제동이 걸리고 영원히 걷고 싶던 마음이 이따금씩 멈춰서고 다가오는 반환점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제는 슬슬 떠나야 하나 아니면 되돌아가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영원히 멈춰서야 하나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들을 수없이 쌓아놓으며, 그 위에 덮이는 먼지들을 보며 언젠가는 저것들을 모두 없애야 할 텐데 그래야만 할 텐데 영원히 저것들을 내 안에 담아놓은 채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 절대 그럴 수 없을 텐데 숨죽인 채 울며 허공을 봅니다 소리 죽인 채 아파하며 침묵을 봅니다 허공과 침묵,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는 나를 봅니다 2022. 5. 12.
바람이 불어오면 천이 바람에 일렁인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천들이 엉키고 묶이고 풀어지다가 다시 엉키고 묶인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신기 어린 것들 뿐이라 절망으로 꾸며진 미래를 감히 짐작하려들 뿐이다 얼굴을 가린대도 목소리의 떨림이 표정을 드러내게 하고 말을 멈춘대도 얼굴의 일그러짐이 말의 떨림을 보이게 한다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모든 것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자 그래, 떠나가자 영원히 떠나가자 혹은 남아있자 그래, 남아있자 영원히 남아있자 2022. 5. 11.
푸른 다시 시작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기로 하였지요 슬픔을 마주하면 한없이 슬퍼하고 기쁨을 맞닥뜨리면 한없이 기뻐하는 그런 삶을, 현실을 살기로 하였지요 멈출 수 없는 태풍이 그린 나선의 형태가 우리의 가치를 매기고 덫에 걸려 낑낑거릴 수밖에 없는 짐승의 애달픈 숨소리를 우리는 알고 있었기에 멈출 수 없다면 멈추지 않는다고 그리 말해요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라는 뜻이에요 푸른 하늘을 밝은 햇살이 가로지르는 날 그날이 오면 우리도 언젠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2022.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