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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104

쥐와 고양이 쥐가 고양이의 배를 쓰다듬는다 고양이는 치즈를 먹고 쥐는 그런 고양이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치즈에 고양이가 죽는 약을 넣어놓았기에 고양이가 치즈를 모조리 비우고 다섯 걸음도 옮기기 전에 픽 하고 쓰러지면 쥐의 잔치가 시작된다 고양이의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뜯어먹는다 고양이가 정신을 잃고 난 후에도 잔치는 끝나지 않는다 뼈만 남은 고양이의 처참한 몰골을 남긴 채 쥐는 위풍당당하게 걸어간다 입가에 벌건 피를 묻히고는 다음에 배고플 때가 다시 오면 쥐는 고양이를 위해 치즈와 약을 준비하리라 쥐가 트림을 한다 땅을 바라보는 쥐의 눈 안에는 개가 인간의 머리를 헤집는 것이 보인다 인간의 목에 채운 목줄을 개가 끌고 다니는 것이 보인다 2022. 7. 27.
유통기한 이 세상 모든 물건에는 유통기한이 쓰여있어 식료품에는 숫자로, 나무에는 나이테로, 민들레엔 흰 꽃으로, 유통기한이 쓰여있어 그 모양들은 그대가 내게 말하고는 했던 구름의 모양과 같네 마음 한편이 지긋하게 아파오네 * 이 세상 모든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적혀있어 기쁨에는 기억으로, 서글픔에는 눈물로, 사랑에는 우리말로, 유통기한이 적혀있어 그 표시들은 그대가 내게 남겨두고 떠난 예쁜 책갈피와 같네 마음 한쪽이 서서히 가늘어지네 2022. 7. 26.
하얀 벽에 물감을 칠하다 수채화 물감에 그대 숨결이 묻어 하얀 벽이 치덕치덕 문대지며 울긋불긋 물감을 마십니다 복잡한 생각들과 알 수 없는 미래들이 물통에 한 가지로 섞여 그저 뿌옇게 보이기만 하는데 자그마한 방, 적막처럼 말이지요 벽에 바람을 그렸다면 바람이 불었을까요 벽에 태양을 그렸다면 태양이 비쳤을까요 벽에 그대를 그렸다면 그대가 나를 위로해줬을까요 벽에 나를 그렸다면 내가 나를 원망하고 욕했을까요 아픈 생각들은 날이 잔뜩 서 있기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마구 할퀴어대서 나의 생각들은 언제나 핏빛입니다 붉습니다 2022. 7. 25.
불꽃놀이 너가 울면 나도 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니 너가 화를 내면 나도 화낼 수 있다는 짐작을 해본 적도 없니 너가 슬픈 만큼 나도 슬픈데 너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아 너가 힘든 만큼 나도 힘든데 너는 그걸 미워한 것 같아 술을 물처럼 들이키다 몸속의 눈물을 모조리 비우고 눈물 대신 술을 흘릴 때 눈이 따가워서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어 모두가 그렇다고 여기다 마음 안의 감정들을 쏟아내고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이 무거워서 나 역시도 한참을 기다렸다고 다가온 이별은 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 그것을 모르는 체하며 어쩌지, 발만 구르다가 폭죽처럼 분리되는 너와 나 다신 가까워질 수 없는 불꽃과 폭약 2022.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