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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길 위 노란 꽃 노란 꽃은 씨앗마저 노랗지 않아 검거나 갈색의 씨앗을 흙에 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니 단지 노란 꽃잎 안고 피어났을 뿐이야 씨앗도 자기가 꽃일 줄은 알지 못했을 거야 슬쩍 건넨 외로움에 사랑이 딸려간 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차가운 회색 길 위에 왼쪽 귀를 대고 진동을 듣고 있어 쓰러진 건지 일부러 누운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귀를 대고 있어 땅이 그르렁댈 때 그 원인이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 있어 아프게 생각하고 슬프게 빛나다 해맑게 저무는 해처럼 텅 빈 길거리에 가득한 침묵과 정적처럼 2022. 9. 25.
홀로 맞이한 겨울 소복이 눈이 쌓이면 그 소리를 따라 먼지 덮인 방 나의 외로움도 소복하게 쌓여간다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그 모습에 내가 움츠러들 때에 내 고독도 따라 덜컹거리며 숨죽인 채 운다 간밤의 꿈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한밤의 별도 나는 가지지 못한 것 쌓이는 눈처럼 나의 목소리가 쌓이면 그 소리가 눈처럼 하얗게 빛날까 부는 바람처럼 나의 목소리로 부르면 그 소리가 바람처럼 멀리 떠날까 그럴 수 있을까 2022. 9. 22.
물감으로 그린 그림 하얀 캔버스에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하얀 곳이 없도록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를 정도로 엉망이지만 왜인지 안정을 주는 빈틈없는 캔버스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른 물감을 바릅니다 물감들은 섞여 본래의 색을 잃고 전혀 다른 색으로,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합니다 붓은 던져버린 지 오래, 두 손을 엉망으로 만들며 치덕치덕 물감을 문댑니다 끈적하게 물감이 잔뜩 묻은 캔버스와 그 앞에 선 어지럽혀진 나와 적막함이 대부분인 방 창 하나도, 시계 하나도 없어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를 나의, 나의 방 이 그림은 끝이 나지 않아 나는 팔로 눈물을 닦다가 얼굴에 묻은 물감을 느끼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2022. 9. 21.
그 애 그 애가 웃을 때 나도 웃어보려고 그 애만 바라보다가 그 애가 나를 보면 나는 얼굴을 붉히고는 애써 딴 곳으로 눈을 돌렸네 한참을 딴청 부리다가 남몰래 다시 그 애를 보면 그 애가 나를 보며 웃고 있어서 나도 그 애를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네 그 애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면 나는 부끄러워 짧게 대답했지 그 애가 내게 다가와 연필을 빌리면 나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며 자못 대담하게 말했지 그러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는 날 우산이 없는 내가 망연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뛰어갈 채비를 할 때 그 애가 자기 우산을 함께 쓰고 가자며 나를 불러서 나는 처음으로 그 애 앞에서 나처럼, 바보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네 2022. 9. 20.